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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상세 내용

인사동 충북갤러리서재, 시간의 정원
Artist' note

1.
인간의 시간은 과거를 회상하고 현대를 살아가면서 미래를 꿈꾸게 한다. 미래를 꿈꾸는 행위는 목표와 가치를 발견하게 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게 한다.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것이며, 꿈꾸는 자가 창조하고 세상을 이끈다.
나의 작업은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시간을 수집하고 거기에서 느낀 감정이나 경험에서 시작한다. 우연히 마주한 작고 낡은 수첩이나, 오래된 먼지 쌓인 책에서 혹은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동물, 공간, 정신, 의식들을 마주하며 느낀 감정으로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든다. 마치 한 권의 소설이나 영화처럼 이야기가 시작되고 소설에서의 한 페이지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표현된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아이 같은 감정으로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무겁거나 가볍지 않게 시각화 하였다.

2
아프리카에서 거주하면서 경험한 익숙함과 낯섦, 도전과 불안, 선택과 갈등에서 비롯된 생각과 감정의 이중적인 내면
을 작업하였다. 실재하지 않는 가상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상상하여 공간을 나누고, 겹치고, 쌓고 올리는 방법으로 경계가 모호한
가상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여러 차원이 존재하는 공간을 ‘동시시간, 동시공간'이라 명명하였고 ‘동시시간, 동시공간’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지속, 미래의 상상에 바탕을 둔 시간성을 시각화 한다.
즉, 존재들의 어제, 오늘, 내일의 표현이다.
상상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질적인 이미지와 소재를 가상 체계로 설정하여 반복과 교차로 배치 화면을 구성, 연출하였다. 구도 역
시 비틀거나 극적인 대비를 주었으며 경험과 상상으로 겹쳐진 다차원적 추상 공간에는 소외된 존재들이 공존, 공유하는 소우주이며 또 다
른 하나의 차원이다. 가상 체계는 가상세계에서 좌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선과 원, 사각형은 하늘과 땅, 우주 등 자연물과 다차원적
공간을 연결하는 ‘시간의 눈‘ 이나 ‘시간의 문'을 상징하고 있다.
현대의 도시 곳곳에서 혹은 일상에서 시간을 수집하면서 갖게 되는 감정을 감각하고, 경험했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작업을 확장시켜
카오스와 같은 혼돈 속에서도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를 일깨우면서 아동폭력, 환경, 계층(인종), 멸종위기 동물들의 미래의 시간을 공간화
하여 그 안에 사회적 문제들을 제시함으로써 시간의 소중함과 도전, 자유, 평등, 공존 등 희망을 전한다.

About

서재, 시간의 정원

서재에는 모든 시간이 존재하며 조화롭게 정원을 이룬다

공간을 의미하는 서재에는 작가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시간의 기본개념인 과거의 기억, 현재의 지속, 미래의 상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으로 시간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으며 보존되어 있다. 유일하게 일상에서 경계가 없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현대인들의 쉼이 되고 시간을 망각할 수 있는 곳으로 서재라는 공간을 주목하였고 선택하여 전시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와 생명의 소중함을 상기하며 정서적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눈을 감고 그곳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서재는 고요하고 편안한 침묵 속에 세대, 계층, 지역, 인종 등 아무런 갈등과 경계 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함께 존재하며 어우러져 시간의 정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작품에서 작가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동시시간, 동시공간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살아가면서 미래를 꿈꾸게 하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것이며, 꿈꾸는 자가 창조하고 세상을 이끈다.

*동시시간, 동시공간 - 동시적인 공간, 동시적인 시간에서 좀 더 어감을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불릴 수 있도록 작가 본인이 줄여서 만들었다.

Exhibitions
Review

상상의 무대를 짜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강달례의 ‘서재, 시간의 정원’ 전은 서재나 도서관처럼 그 안을 채웠을 수많은 책처럼 여러 시공간이 빼곡히 접혀있다. 포스터에도 사용된 도서관은 50여 점의 전시 작품을 위해 ‘수집’했던 시공간이 망라되는 상징적 우주를 대표한다. 그 공간은 우선 작가가 독서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부터 시작된다. 그는 책 속에 완전히 빠져들며, 책을 읽으면 장면이 떠오르고 그것이 그림으로 발전된다. 물론 특정 책 내용의 삽화가 아니라, 책을 출발로 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공간에 접어 넣은(독자에겐 펼치는) 시간이 바로 서사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무처럼 끝없는 가지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에게는 뿌리나 열매 보다는 그 사이의 여정이 중요하다. 무성해진 가지들은 전에 없던 길이 되어 낯선 풍경을 만든다. 책이라는 소재가 아니어도 책은 그림과 밀접하다. 둘 다 어떤 세계이며, 강달례의 경우에는 세계들이다. 필립 블롬은 [수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에서 책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수많은 인생,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목소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책은 유물인 동시에 전성기의 매력을 영원히 유지하는 물건’(필립 블롬)이다. 강달례에게 책이나 그것이 모여있는 장소는 ‘세상에 수집품이 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사실’과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필립 블롬)을 말해준다. (책)읽기는 쓰기를 추동한다. 일반독자들과 달리 작가에게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글쓴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커다란 이유이며, 최고의 가치는 책’(보르헤스)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책은 하나의 세계이고 세계는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한다. 블랑쇼는 보르헤스가 [픽션들]에서 말한 이 순진한 동어반복에서 무서운 결과가 생겨난다고 보는데, 그것은 기준의 한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세계와 책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그들의 반사된 이미지를 서로에게 보낸다...이 무한하고 반짝이는 번식, 그것은 빛의 미로’(블랑쇼)이다.
세계가 도서관이고 그 역도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곳에서 저자가 만든 의미체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같은 공간에서 작가가 삶이나 작업에서 원하는 ‘빛나는 시간’을 맞을 수 있다. 강달례는 ‘존재들 모두가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간을 찾아 주인공이 되기를 희망’한다. 빛나는 시간은 선형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도약과 비약이 일어나는 기적의 시간이다. 작가에게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다. 작품 제목에도 사용되어 시리즈로 그려진 ‘동시시간, 동시공간’은 ‘동시적인 공간, 동시적인 시간에서 좀 더 어감을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불릴 수 있도록’ 만든 줄임말이다. ‘동시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상상으로 나누고, 겹치고, 쌓고, 올리는 방법으로 경계가 모호한 가상세계를 구축’한다. ‘여러 차원이 존재하는 공간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지속, 미래의 상상에 바탕을 둔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존재들의 어제, 오늘, 내일’이다.
일상에서 고갈된 에너지가 충전되는 공간이 바로 책같은 도서관이며, 책들은 그 각각이 또 다른 도서관이다. 그림의 크기나 비율은 책처럼 네모난 기본적인 틀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과 관련된다. 하지만 여러 시공간을 다루는 특성상, 작품들 간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작동한다. 설치작품도 시도해 본적이 있지만, 평면이나 그린다는 선택 또한 제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선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강달례의 작품은 평면에 마치 건축 하는 기분으로 그려진다. 작업은 상상의 무대를 짜는 행위이다. 필립 블롬이 말하듯이 서재나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무작정 되는대로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식으로 분류하여 정리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장소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세계가 구조 안에 정렬되어 있다. 강달례의 작품은 건축적 구조가 편재한다. 건축과 책이 관련되는 오래된 지점은 바벨탑의 신화일 것이다. 필립 블롬은 바벨탑이 도서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바벨탑의 기본 정신은 공통 언어였다. ‘그 상형문자들은 세계의 진정한 질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비밀지식이었을 것’(필립 블롬)이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되었고 공통 언어 또한 해체됐다. 그래서 이후의 사람들은 미로 안을 헤매고 돌아다니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 건축적 무대에서 작가를 대신해서 사색하고 행위하는 존재는 스폰지밥이다. 스폰지밥은 작가가 스스로와 닮았다고 여기는 캐릭터로, 항상 웃고 자신이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쾌하고 힘을 주는 존재다. 그림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이 캐릭터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있는 작품을 전달하는 매개자에 해당한다. 강달례의 작품은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꾼다. 그것이 꿈인 이유는 삶의 중력이 강고한 현실 질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리라. 수면 시간 뿐 아니라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능적 활동을 제외한 시간에 꿈은 작동하며, 대개 인간을 소외시키는 팍팍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 또한 꿈이다.
예술은 현실에서 비현실성의 몫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늘리려 한다. 스폰지밥 캐릭터는 현실에서도 발견되는 아치나 직선들로 이루어진 건축적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상상에 대한 조형적 언어는 19세기 말의 요동치는 선의 흐름을 이어받는 1960년대의 싸이키델릭 문화가 전형적이다. 강달례의 작품에도 굽이치는 화려한 색의 물결이 등장하긴 하지만 대개는 선에 귀속되는 보조적 위치를 차지한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곡선적 흐름은 시점과 종점이 명확한 직선과는 다르다. 직선적 요소로 구성된 작품 또한 환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직선적 형태는 유지된 채 휘어지며,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바코드 형태에서 선의 간격은 제각각이다. 어디로 연결된지 모를 계단이나 문들도 수시로 등장한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왔지만 배치가 비현실적이다. 그 세계는 작가가 좋아하는 바둑이나 퍼즐처럼 다양한 게임의 수(數)에 의해 작동한다.
캐스린 흄은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보르헤스의 [바빌론의 제비뽑기]가 삶을 우연의 게임으로 축소하면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축소되고 골격만 앙상한 허구의 세계는 우리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삭감은 성공을 거둔다. 그것은 예술과 놀이의 공통 문법이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픽션과 놀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메시지로서의 기호들의 집합(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과 문맥 또는 메시지의 틀 사이의 관계를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서 하나의 대안적인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은 또 다른 상징적인 세계들을 창조한다는 면에서’(퍼트리샤 워) 놀이이다. 강달례는 공기 없는 무중력 공간이나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씨름선수처럼 상대의 힘을 되치기로 받아내는 전략을 쓴다. 문명은 자연에는 빛이나 수평선 외에 부재 하는 직선이 주요한 요소를 이루며, 국제주의 양식이 주도했던 근대 도시에서 정점을 이룬다.
물론 기술이 더욱 발달하면 SF영화의 장면처럼 기계적 사각틀을 넘어서 자유로운 형태의 건축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수직/수평의 명확한 좌표적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추상적 공간이다. 좌표는 더욱 촘촘하고 치밀해진다. 감시와 조절을 동시에 수행하는 좌표는 과거에 가능하지 않은 부분까지 확장되어 권력은 편재한다. 현대인은 그러한 추상적인 좌표계의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그의 한 작품처럼 바닥이 없는 심연의 공간이다. 보이지 않은 그 눈금은 소유나 권리관계가 선명하다. 현실은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이 통과해야 하는 그 가느다란 덫들로 가득한 지뢰밭같이 깔려있다. 보이는/보이지 않는 경계를 위반하는 순간 제재가 가해지며, 평화를 위해서는 경계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현대의 미덕이 되었다. 하지만 예술은 현실의 한계와 굴레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재현주의는 거부된다.
강달례의 그림 속에 작동하는 ‘가상 체계는 가상세계에서 좌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선과 원, 사각형은 하늘과 땅, 우주 등 다차원적 공간을 연결하는 시간의 눈 이나 시간의 문을 상징’하면서 탈주로를 암시한다. 구조를 위한 구조가 아니라 사건과 관련되며 작가에게는 예술적 유희나 탈주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예술도 종교나 과학처럼 하나의 구조처럼 여겨진다. 이야기도 ‘사물들, 사건들, 그리고 존재들처럼 거기서 일련의 선으로 기하학적인 형태로 배치’(블랑쇼)된다. 강달례의 작품 속 여러 틀은 구속과 환원보다는 놀이와 확장에 방점이 찍히는 조형적인 장치이다. 퍼트리샤 워에 의하면 픽션은 단지 상이한 여러 가지 틀의 집합이며, 관습들과 구조들의 상이한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리얼리스트 양식에서 모더니스트 양식으로 나아감에 따라 틀은 쉽게 감지될 수 있으며, 메타 픽션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강달례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같은 캐릭터 스폰지밥은 어떤 상황에도 극도로 긍정적인 표정이 특징이다. 스마일 마크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면 스폰지밥은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더 강력한 인상이다. 편집증적인 수직 수평의 그리드 문명에서 견디거나 또는 무덤덤하게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분열증적 캐릭터가 필요하다. 다 알고는 통과하기 힘들었을 역경이 정말 큰 역경이다. 작가에게도 순간순간에 일희일비 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스펀지 특유의 다공질 구조는 강한 충격을 받아내는 완충성, 복원성이 있어 희망적인 캐릭터일 수 있다. 40대 때 삶의 고비가 한꺼번에 밀려들었을 때 작가는 그림을 통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고, 캐릭터는 탈주를 위한 변신의 매개가 되었다. 작품 [동시시간,동시공간_울렁울렁](2020)은 계단, 통로, 진자, 바코드, 숫자, 스폰지 밥 등 작품의 구성요소들이 등장한다. 몇 가지 한정된 요소지만 조합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 된다.
[동시시간,동시공간-] 시리즈는 여러 시공간의 중첩을 말한다. [동시시간,동시공간_Time Button](2020)은 바코드 배경에 플레이 버튼, 그 위에 체크무늬 패널 등이 특별한 연결고리 없이 중첩된다. [동시시간,동시공간_세개의 시간](2019)에서 원근법적으로 배열된 사각체크/바코드/아치형 문 또는 창이 중첩되는데, 각 공간은 다른 색으로 구별된다. [동시시간,동시공간_때론, 삐딱하거나 거꾸로](2020)에서는 앞으로도 뒤로도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들 위로 스폰지밥이 움직인다. 무한히 순환하는 또는 미로적 시공간이다. 미로에서 시공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나며, 그것이 즐길만한 유희인지 악(惡)무한의 고통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끝이 안보이는 분홍기둥의 구조가 있는 [동시시간,동시공간_시간이 꽃잎처럼 떨어지다](2018)에서 바닥에 떨어진 숫자들이 일부만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에서는 낭비된 시간은 없다. 예술은 부정적인 모든 것도 양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넉넉한 텃밭이다.
계단과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평면으로 이루어진 [작은 영웅들_가자 세상 밖으로](2023)는 그곳을 탈주하는 캐릭터가 향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이 있는 공간과 구별된다. [나비야 나비야 뭐하니](2015)는 깊고 푸른 계단 위 빛의 방향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보는 스폰지밥이 출구를 찾은 것 같은 예감이다. 출구 중의 하나는 그림이다. 작가의 삶에서 예술이 그러한 위상을 가진다. [동시시간,동시공간_수만가지 이유로](2020)에서 체크무늬 바닥 위에 물리적, 가상적 계단이 배치. 문 중의 하나는 그림이다. 그림 안으로 들어간 스폰지밥은 저 건너편 하얀 선으로만 표시된 보다 추상적인 공간 안으로 이동한다. 강렬한 블랙/옐로우 색상의 병치는 일상에서 위험의 기호이기도 하다. 작품 [동시시간,동시공간_시간과 공간을 넘어서](2020)는 일상적 현실과 작업 모두에서 일어나야 하는 탈주의 조건이 있다. 겹겹의 담처럼 보이는 구조들은 빛이 들어와 그늘이 지는 현실적 공간이기도 하다.
바코드 위아래로 배치된 동화 속의 성같은 [동시시간,동시공간_시간의 성](2019)에서 성(城)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곳은 공격과 방어의 최전선이다. 그러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쌓여야 한다. [동시시간,동시공간_어제, 오늘, 내일](2020)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탁 트인 지평선이 특징이다. 하지만 사막이나 바다같은 공간이 그렇듯이 트여있다고 해서 미로라는 조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평선 저편으로 신나게 나아가는 스펀지 밥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바코드같은 강력한 기하학적 띠를 만든다. 바코드가 이미 만들어진 것에 부여되는 것이든 지나간 자리는 보다 명확하다. 하늘에는 진자들이 움직이면서 경기같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동시시간,동시공간_오늘은 나, 내일은 너](2019)에도 진자가 등장한다. 여기의 진자는 한 개이며 과녘을 향한다. 바코드를 배경으로 하는 육면체들 위에 앉아있는 스폰지밥은 이리저리 경우의 수를 가늠해 본다. 실제로 작가는 바둑이나 퍼즐같은 놀이를 좋아한다.
그림이 주된 창작방식이듯 아나로그적 취향이다. 독서나 그림같은 실천은 가상적이지만 디지털 게임과도 차이가 있다. 강달례에게 차원의 이동은 독서나 사유를 통해 일어난다. 작품 [나무의 시간](2018)은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정사각형 흑/백이 교차된 바닥재가 나온다. 그것은 실제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그러한 바닥이 있는 화장실 같은 공간에서는 생각이 깊어진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투입된 것들이 잘 소화되어 생산물로 나와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 아닐까. 예술 또한 체화의 산물인 것이다. 여기에서 스폰지밥은 생각의 나무를 키운다. [생각이 자라는 나무의 시간](2018)에서 나무가 자라는 타일 바닥을 나가는 방식은 문을 그리는 것이다. 미지의 시공간은 화려하거나 어둡다. 스폰지밥은 그 경계에 서있다. 위아래로 화려한 색/빛이 있는 경계에 앉아있는 스폰지밥을 그린 [내일](2024)에서 자신이 속하지는 않은 그곳들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내일이 있다.
검은 우주공간, 육면체 위에 고독하게 서있는 스폰지밥이 있는 [동시시간,동시공간_거대한 우주에 짧은 문장을 새기다](2020)에서는 천문학적 시간대와 한 개체의 시간대를 대조한다. 강달례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코드 형태는 생산/소비의 회로에 진입한 기존의 것이다. [동시시간,동시공간_바늘없는 시간]( 2018)은 바코드 형태의 띠가 무대막처럼 내려오고 숫자가 새겨진 박스들이 매달려 있다. 박스 중 하나에서 고개 내미는 스폰지밥은 생산물이라는 생태계 속의 개체를 말한다. 물론 코드로 이루어진 생태계에 사는 개체들이 모두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가장자리가 숫자로 둘러싸인 원근법적 공간이 있는 [동시시간,동시공간_수만가지 이유로](2019)에서 스폰지밥을 비롯하여 기하학적 공간 위에 놓인 것은 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다. 강달례의 작품에서 두루 보이는 강력한 기하학적 틀거리는 다름을 이야기하기 위한 역설적 장치로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