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kip to main content

충북갤러리 / NEO art center

충북갤러리 로고 및 주요링크

본문 영역

Current

'Current' 컨텐츠

충북갤러리 시·군 문화예술기관 협력 초대전 <구자승 x 장지원> 포스터 배경

컨텐츠 영역

충북갤러리 시·군 문화예술기관 협력 초대전 <구자승 x 장지원> 상세보기

게시판 상세 내용

인사동 충북갤러리충북갤러리 시·군 문화예술기관 협력 초대전 <구자승 x 장지원>
Exhibition Details
  • 전시일정 Sep 25 - Oct 13, 2025
  • 참여작가 구자승 외 1명
    • 구자승
    • 장지원
Artist' note

작가노트(구자승)
숨을 쉬는 그림, 그 미세한 호흡을 찾아서

서양화가 구자승

발아래 남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홈 아틀리에서 오늘도 나는 작업실에 박혀있다. 적막이 나를 다스릴때면 나는 모처럼 사색에 잠겨 홀로 나만이 갖는 이 유일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행복한 시간을 갖기 위해 나는 이곳에 웅지를 틀었다.

나느 요즘 거의 정물화에 매달려 있다. 정물화는 영어로 'Still Life'이다. 'Still'은 '움직이지 않는다.' 또는 '침묵'의 의미로 풀이된다. 즉,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둔다는 의미를 둘 수 있는데, 그 빠르게 흐르는 속에 내맡겨진 삶의 한 순간을 정지시키려 한다. 대신 그대로 재현하거나 옮겨놓는 작업이 아니라, 실은 그 나름대로의 시간의 흐름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물화 소재 중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물들을 선호한다. 물론 조선백자 및 토기 같은 옛 그릇이 등장하는 작품도 있지만, 대다수의 글라스, 술병, 꽃병과 같은 평범한 모티브들이 내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소재는 그림에서 느끼는 친숙성과도 관계가 있지만 일상적으로 눈에 익은 탓에 그림 속의 소재로 등장했을 때는 낯설지 않다는 심리적인 친근감을 주는 것도 한 몫을 한다.
때론 무언가 색다른 느낌을 유도해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모티브를 화폭 안에 이끌어 내기도 한다. 커다란 궤짝 위에 계란, 파이프, 어울리지 않는 긴 막대기를 화폭에 담는다. 이러한 대상들은 섬세함과 빛의 반사효과 등으로 각각의 만남과 조화를 이룬다. 정물에서 자주 등장되는 유리잔, 도기, 청동 차 주전자, 주철 냄비,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자기존재를 부각 시킬 때면 마치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하듯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극적 순간들을 포착 한다.
많은 사물들을 의도적으로 화폭 중심에 몰아놓고 그 군집이 빚어내는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아름다움과 상대적으로 사물 주위의 비어 있는 많은 공간, 동양의 사유의 공간 개념을 마치 우리나라 이조 백자나 동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여백처럼 현대적 감각을 동양적 시각으로 즐기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극사실주의 화풍 가운데에서 인물화나 풍경화가 아닌 정물화를 주로 많이 가까이 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나타 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이야기 거리를 찾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비롯 소재들을 찾아 거리여기저기를 배회하기도 한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형태감, 질감과 색채를 고려하여 한데 모아 놓을때 극적인 분위기를 스스로 즐기곤 한다. 전통적인 정물화가 주로 시각적인 화려함을 추구해 온 반면, 나는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철저하게 계획된 나만의 의도가 숨어 있다. 각각의 물체들이 상대를 비추고, 또 가리기도 하며 만들어내는 조형미. 그것이 바로 나의 영감을 자극하는 한 덩어리 오브제이다.
프랑스 미술 비평가 호제뷰이어가 나의 그림을 보고 “구자승의 작품을 보면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단편적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나는 밑그림 정도로 여겨지는 제 3의 장르라 할 수 있는 드로잉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3분 안에 그리는 작업이지만, 드로잉은 무수히 많은 조형언어를 내재하고 있는 조형언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필선이 느껴지는 3분 드로잉. 나도 이 드로잉을 할 때는 심취해서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선 하나하나 그을 때, 농담 하나하나를 처리해 들어갈 때마다 때로는 황홀하기도 하고, 때로는 드로잉과 함께 취해 있는 나를 발견할때는 이미 나는 다른세계에 와 있음을 자각 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쥬 바따유(Georges Bataille,1897-1962)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모든 것은 그 정서적인 미적 감수성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드로잉을 통해서 사물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고 헸다. ‘라이프 드로잉’이라고도 하는 이 드로잉은 선(線)의 아름다움을 중요시 하기도 한다. 앵그르라는 화가는 ”line is drawing!”이라고 했다. 이 드로잉의 선이 주는 의미는 대단하다. 선의 스피드에 의해 강약에 의해서 생기는 그 동세(動勢), 움직임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드로잉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된 것은 1979년 캐나다 유학시절부터이다. 사랑에 빠지면 열병을 앓듯이, 여기에 몰입하여 상상을 못할 정도로 미쳤었다. 선을 긋고 문지르다 손톱이 달아 구녕이 나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30년 가까이 드로잉 작업을 해 왔다.

나는 내 작품에서 감정의 과잉을 억제하면서 철저한 이지적인 태도로 모티브와 대결하는 치열한 정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숨을 쉬는 그림, 그 대상들이 주는 더 미세한 호흡을 찾으려 늘 탐구한다. 마치 그려놓은 대상이 무생물체의 큰 덩어리가 아닌, 무수한 꿈의 파편들이 부서져 그 잔해의 흔적들을 극복하고 온전한 오브제가 되기까지 상처투성이의 그 정물들을 나는 그림 속에서 치유한다.


작가노트(장지원)

나는 40여년 넘게 내 작품에 “숨겨진 차원”이란 명제를 고집하고 있다. 나의 작품은 은유(Mataphor)의 비유법으로 사물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내재 되어있는 이미지를 밖으로 표출해 켄바스에 옮긴다.
삶의 감각을 깨우며 기억 속에 숨겨져 있는 나만의 생각들을 이미지로 끌어내 재 구성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어떠한 이미지를 설정해서 보여지는 세계보다 숨겨져 있는 무수한 것들을 켄바스에 만들어 낸다. “그린다”라기보단 “만든다”라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란 정상이 없는 산행과도 같아서 끝없이 매달려 작업하다 보면 수많은 미련과 아쉬움을 남기는 수행 같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작품을 통해 나의 꿈을 펼쳐가는 이 무수한 작업들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나는 오늘도 숨겨진 차원 속에서 끝을 모르는 작업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장지원

About

충북갤러리에서 마련된 《구자승 X 장지원》 초대전은 충북 화단의 예술적 성취와 그 저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뜻깊은 자리이다. 이번 전시는 지역 문화예술기관의 협력을 통해 기획되었으며, 원로 작가 두 작가의 오랜 창작 여정을 집약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예술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구자승 작가는 정물화라는 장르를 극사실주의적 언어로 새롭게 갱신하여, 한국 사실주의 회화의 중요한 지평을 열어왔다. 그의 화면 속 사물들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멈춘 시간’ 속에서 존재론적 사유를 촉발하며, 정물화의 철학적 전통을 동시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장지원 작가는 상징과 초월의 차원을 탐구하며, 동시대 회화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해왔다. 그의 작품은 무의식과 상상력, 신화적 상징을 담아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회화적으로 시각화하는 독자적 성과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두 거장의 작품 세계가 한 자리에서 교차함으로써, 사실과 상징, 정지와 초월이라는 상이한 궤적이 공존하는 미학적 장을 형성한다. 이는 충북 화단의 예술적 위상을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이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충북문화재단과 충주문화관광재단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예술적 모범을 보여주신 두 분 작가께 경의를 표한다. 이번 전시가 관람객들에게 예술의 본질적 가치와 깊은 울림을 전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2025년 9월
노윤정 미술평론가, ㈜쿤스트코드 대표이사

Exhibitions
Review

정물화의 계보와 구자승의 철학적 정물화

노윤정 미술평론가, ㈜쿤스트코드 대표이사


정물화는 미술사의 주변부에 속한 장르로 오랫동안 저평가되었다. 인물이나 역사적 서사에 비해 "사소한 사물"을 다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물화는 바로 그 사소함 속에서 삶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응축해왔다.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은 죽음을 환기하는 해골과 시든 꽃으로 유한성을 설파했고, 샤르댕은 일상적 그릇에 담긴 겸허한 존엄을 포착했다. 세잔은 사과와 병을 반복하여 그리는 과정속에서 회화의 구조적 질서를 탐구했으며, 모란디는 항아리와 병을 통해 존재의 침묵과 시간의 흐름을 명상했다. 정물화는 단순한 대상의 묘사가 아니라, 시대마다 다른 철학적 질문을 발화하는 장르였던 것이다.

구자승의 정물화는 이 연대기의 맥락을 이어받으면서도 한국 현대회화의 특수한 지점에 서 있다. 그의 화면 속 사물은 극도로 사실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모방의 사실주의가 아니다. 구자승의 정물은 흐르는 시간을 끊고, 변화를 봉인하며, 순간을 영원으로 전환한다. 과일은 썩지 않고, 유리잔의 반짝임은 고정되며, 그림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시간의 흐름에서 해방시켜 화면 안에 가두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의 개념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모란디가 정물의 반복 속에서 질적인 시간의 흐름을 드러냈다면, 구자승은 그 흐름 자체를 차단한다. 그의 회화는 질적 시간의 단절, 다시 말해 "멈춘 지속"을 제시한다. 바로 이 역설적 긴장 속에서 그의 정물은 독자적인 현대적 의미를 획득한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aura)의 문제 역시 주목할 만하다. 기계복제가 예술의 아우라를 해체한다고 했을 때, 구자승의 극사실적 묘사는 사진적 이미지와 닮아 있어 아우라의 소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집요한 손의 노동과 화면의 절제된 긴장은 사진을 넘어서는 고유한 현존감을 발생시킨다. 그의 정물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긴장을 만들어내며, 그 긴장 속에서 아우라는 다시 생성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지각 이론으로 본다면, 구자승의 회화는 보는 행위 자체를 사유하게 한다. 현실 속 사물은 반드시 변화하고 소멸하지만, 그의 화면 속 사물은 영원히 멈춰 있다. 관람자는 이 괴리 속에서 지각의 본질을 다시 묻게 되며, 정물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존재와 환영, 시간과 정지의 경계를 탐구하는 장치로 변모한다.

결국 구자승의 정물화는 네덜란드 정물의 죽음의 성찰, 샤르댕의 일상적 존엄, 세잔의 구조 탐구, 모란디의 명상적 고요를 이어받으면서도, 극사실주의라는 방법론을 통해 고유한 현대적 지평을 연다. 그것은 빠른 속도와 이미지의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에 "멈춤"과 "응시"를 요구하며, 관람자에게 다시금 사물의 본질과 시간의 의미를 묻는다.

정물은 늘 사소하게 여겨졌지만, 구자승의 회화는 그 사소함 속에 거대한 질문을 담는다. 화면 속 사물은 우리 앞에 고정된 채로,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듯이 응시한다. 그의 정물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정지된 시간 속에서 존재를 사유하게 만드는 철학적 회화이다. 바로 그 점에서 구자승은 정물화의 오랜 계보를 새롭게 갱신하며, 동시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독창적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

참고문헌

Bergson, Henri. Time and Free Will: An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 Dover Publications, 2001.
Benjamin, Walter.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Suhrkamp, 1963.
Merleau-Ponty, Mauric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Routledge, 1962.
Chardin, Jean-Baptiste-Siméon. 전시도록 및 주요 평론집.
Cézanne, Paul. Letters and Writings. (다양한 미술사 자료집).
Morandi, Giorgio. 주요 전시도록 및 평론 자료.
정영목, 『서양미술사』, 미진사, 2015.
윤난지, 『현대미술과 철학』, 문학과지성사, 2019.
---------------------------------------------------------------------------

숨겨진 차원과 존재의 탐구 ― 장지원 회화의 철학적 해석

노윤정 미술평론가, ㈜쿤스트코드 대표이사

회화는 언제나 단순히 보이는 세계의 재현을 넘어,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세계를 탐구하는 매체였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예술은 그 현상을 넘어선 차원, 곧 ‘숨겨진 세계’를 드러내는 힘을 지녀왔다. 고대 종교화가 신성의 초월적 세계를 표상했고,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 회화는 자연의 충실한 재현 속에서도 신과 인간, 본질과 현상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세기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은 무의식과 내면의 환영을 화폭에 불러냈으며, 20세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의식의 언어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했다. 이러한 궤적은 예술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을 드러내려는 시도임을 증명한다.

장지원의 작업 「숨겨진 차원」은 바로 이 긴 전통의 현대적 변주이다. 그의 회화는 표면적 세계의 묘사를 넘어서, 그 배후에 잠재된 본질적 세계를 암시한다. 여기에는 세 명의 선배 화가―르동, 샤갈, 고갱―의 계보가 겹겹이 깔려 있다. 르동이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며 상징주의의 언어를 개척했다면, 장지원은 색채와 구성, 이미지의 상징적 배열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차원을 불러낸다. 샤갈이 기억과 꿈, 현실과 환영을 뒤섞어 초현실적 서정을 창조했듯, 장지원은 일상적 장면을 해체하고 변형시켜, 현실 너머의 정서를 환기한다. 고갱이 문명의 피상성을 넘어 원시적 신화와 영성의 세계를 탐구했듯이, 장지원은 현대적 문명 경험의 이면에서 원형적 차원을 회화적으로 구현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업은 플라톤과 칸트가 던진 근본적 질문을 되살린다. 플라톤은 감각 세계를 이데아의 그림자로 간주했으며, 참된 실재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라 했다. 칸트는 인간이 접하는 것은 현상일 뿐, 본질인 물자체(noumenon)는 인식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장지원의 회화는 바로 이 현상과 본질 사이의 간극에서 탄생한다. 그의 화면은 표면적으로는 풍경과 인물을 담고 있지만, 실상은 현상을 넘어서 본질을 환기하는 장치이다. 이때 그의 색채와 형상은 단순한 시각적 기호가 아니라, 본질을 가리키는 흔적이며, 현상 너머를 향한 철학적 지표이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은 이러한 시도를 더욱 선명하게 설명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와 인간이 분리되지 않으며, 보는 행위 자체가 존재와의 관계라고 보았다. 장지원의 화면은 이 지각의 철학을 실천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재현하지 않고, 보는 행위를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보이는 것의 두께”를 느끼게 한다. 화면 앞에 선 우리는, 단순히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깊이와 차원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쾌락을 넘어, 존재론적 사유를 촉발한다.

한편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의 회화는 무의식의 상징 체계를 불러낸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언어라 했고, 융은 집단적 무의식과 원형(archetype)을 제시했다. 장지원의 작업은 꿈과도 같은 서사를 제시하며, 보편적 상징을 통해 관람자의 내면을 자극한다. 그의 화면은 개인적 체험에 근거하지만, 그것을 넘어 집단적 기억과 원형적 세계로 확장된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을 마주하는 경험은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이는 바로 무의식의 언어가 지닌 이중적 성격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장지원의 회화를 동시대적 맥락 속에서 다시 읽게 한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이 기술적 세계에 매몰되어 ‘존재 망각’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장지원의 회화는 바로 이 망각된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다. 그의 색채와 형상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관람자로 하여금 잊혀진 존재의 차원을 다시 묻게 만든다. 「숨겨진 차원」은 따라서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존재의 심층을 열어젖히는 철학적 창이다.

장지원의 회화 앞에 선 관람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전부인가? 혹은 그 너머에 다른 차원이 존재하는가?” 그의 화면은 이 질문을 강제한다. 색채와 형상은 표면적으로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표면을 넘어 그 이면을 탐색하게 된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그의 회화는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철학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결국 장지원의 「숨겨진 차원」은 단순히 한 화가의 개별적 성취가 아니라, 서양 회화가 이어온 긴 전통 속에서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사유의 장치다. 르동의 상징주의, 샤갈의 초현실적 서정, 고갱의 영적 탐구를 계승하면서도, 동시대적 맥락 속에서 ‘숨겨진 차원’을 열어젖힌다. 그것은 회화가 여전히 존재의 심층을 탐구하는 유효한 매체임을 증명하며, 관람자에게 사유와 체험을 동시에 요구한다.

장지원의 회화는 우리에게 다시금 묻는다. “보이는 세계 너머, 숨겨진 차원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의 그림은 그 물음을 색채와 형상으로 던지며, 예술의 본질적 사명을 오늘날에도 웅변한다.


Benjamin, W. (1936).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Frankfurt: Suhrkamp.
Bergson, H. (1911). Creative Evolution. (A. Mitchell, Trans.). London: Macmillan. (Original work published 1907).
Freud, S. (2010).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J. Strachey, Trans.). New York: Basic Books. (Original work published 1900).
Gauguin, P. (1996). Noa Noa: The Tahitian Journal. New York: Dover Publications. (Original work published 1901).
Heidegger, M. (1962). Being and Time. (J. Macquarrie & E. Robinson, Trans.). New York: Harper & Row. (Original work published 1927).
Jung, C. G. (1968). The Archetypes and the Collective Unconscious. (R. F. C. Hull, Tra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59).
Kant, I. (1998). Critique of Pure Reason. (P. Guyer & A. W. Wood, Tr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781).
Merleau-Ponty, M. (2012). Phenomenology of Perception. (D. A. Landes, Trans.). London: Routledge. (Original work published 1945).
Plato. (1997). Complete Works. (J. M. Cooper, Ed.).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Original works ca. 375 BCE).
Redon, O. (1986). To Myself: Notes on Life, Art, and Artists. New York: George Braziller. (Original work published 1922).
Shestack, A. (1989). Odilon Redon and the Transformation of Symbolism. 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
Chagall, M. (1994). My Life. Boston: Da Capo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