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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충북갤러리 기획전 <조병현 회고전 - 추상에서 풍경으로의 여정>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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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충북갤러리2025 충북갤러리 기획전 <조병현 회고전 - 추상에서 풍경으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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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에서 풍경으로의 여정 ● 충북문화관은 개관 이래 충북 미술사의 토대가 되는 1920~30년대 출생 충북 연고 작고 작가들을 지속해서 조명해 왔다. 2025년 상반기에는 그동안 충북문화관에서 진행되었던 기획전을 중심으로 충북미술 아카이브전 ‘충북미술의 지형도를 읽다’를 열었고, 그와 연계하여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그동안 작고 인물 중심의 전시가 진행되어 충북 미술의 역사적 기반을 다져왔지만, 더 굳건하고 폭넓은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후속 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었다. ● 특히 그동안 미처 다루지 못했던 ‘충북 근대기 미술사’에 관한 초기 연구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 대한 심층적 서사 구축과 다양한 자료 수집의 중요성이 언급됐다. 이를 토대로 지역 미술사 연구는 작고 작가뿐만 아니라, 현재 활발히 작업을 이어오는 작가군의 발굴도 함께 포함하여 진행되어야 하겠다. 충북예술의 자리매김을 위해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작고 작가의 발굴이 우선 더 시급하고 그 토대로 우리 지역 미술의 역사가 견고해질 것이다. ● 그 선상에서 충북문화관은 하반기 기획전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청주 출신의 근대기 작가인 조병현(1921~2011)의 작품을 회고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 조병현은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계열 선두 작가로, 한국현대미술의 시대적 흐름과 함께하며 여러 주요 단체 ‘신조형파, 신상전, 상형전, 현대사생회’ 등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추상회화 대신 구상 작업으로 전향하여 자연을 스승 삼아 자연을 관찰하며 ‘기운생동’하는 풍경에 천착하였다. 이는 시대적 평가를 벗어나 한국적 풍경을 통해 구상작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입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병현(조병현 관련 내용은「조병현」(2007, 삼성문화재단 구술사 원로작가프로젝트, 기획Leeum"한국미술기록보존소")의 구술 채록을 근거로 한다.)은 국전과는 거리가 먼 화단의 야인이었다. 국전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계속 떨어지는 이유로 다시는 국전에 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위의 책 p. 28.) 결과적으로 국전에 참여 안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해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조병현은 평소 남 앞에 잘 드러내지 않고 말이 적은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녔다. 당시 화단에서 ‘국전 작가’가 되어야 알아주는 풍토였기에, 재야작가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고,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숙명적으로 ‘관(官)과는 인연이 없었다’라며 화단의 명리를 좇기보다는 고집스럽게 재야작가로서 활동하며 개인전을 18회나 개최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 이번 전시는 조병현의 초기 기하학적 추상 작품으로부터 ‘자연을 스승 삼아 그린 풍경으로의 여정’을 통해 작품세계가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고 전환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조병현의 화단 입문 ● 조병현은 1921년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에서 태어나 10살까지 괴산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주한 후 효창초등학교와 선린상업중학교를 졸업했다. 효창초등학교로 전학한 후 그림에 소질을 보인 그는 미술 시간에 일본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저놈은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다.’(같은 책 p. 17.) 라는 말을 친구를 통해 전해 듣고, 그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부모 몰래 도항증 없이 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어려운 환경에서 1943년까지 도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조병현은 구술사 기록에 따르면 어려운 형편에 일본에 가서 친구 형님 집에 머물면서 낮에는 주사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태평양미술학교의 연구 과정에 다닌 것으로 나온다. 이후 도쿄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논문을 제출하고 교수 자격증을 취득, 홍익공업전문대학에 갈 수 있었다. 같은 책 p.44. p.58. p.152.)했다. 수학 시절 조병현은 일본에서 관전보다 민전인 2과(二科)전 등에서 재야작가들이 더 자유로운 화풍(같은 책 p. 47.)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20대 초반에 접한 이런 자유스러운 예술적 경험은, 귀국 후 한국화단에서 생활이 매우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야작가로 창작 활동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 조병현은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실기를 배운 경험으로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일찌감치 서구 현대미술의 흐름을 따랐다. 조병현은 1943년에 귀국해서 1944년 제23회 ≪조선미전≫에 "농촌풍경"으로 처음 입선(서양화 부분, 조병현, 경성부, 농촌풍경, 매일신보, 1944. 5. 30.)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창설되면서 대부분 미술가가 가입했듯이, 조병현은 1946년에 조선미술동맹(조선조형예술동맹과 조선미술가동맹이 합쳐 조선미술동맹이 1946년에 창립 )에 참여하였다. ● 1950년은 그의 예술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3월에 조병현은 동화백화점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50년협회’(‘50년협회’는 50년 해 한국화단을 대표했다. 1950년 1월 초에 한국문화연구소 주최로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김환기, 남관, 이쾌대가 대표위원, 김병기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조병현은 이때 추천회원으로, 이해 7월 초에 회원전이 열리기로 했으나, 6.25전쟁으로 결렬되었다. 같은 책, p. 176.) 창립총회에 20대의 나이임에도 추천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조병현은 ‘50년협회’ 작품을 위해 시골에 갔다가 6·25전쟁을 겪고, 8월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일자리가 막막해진 그는 유진명(유진명(俞鎭明, 1916~1984), 서울대 미대 강사, 1948년 좌익 검거때 검거, 투옥. 625전쟁 발발 시 서울시 미술동맹 조각반, 서울시 물질문화유물보존위원으로 활동하다 9.28때 월북했다. 같은 책 p. 59.)의 소개로 수도여고에서 1개월간 재직했다고 한다. 이 당시 조병현은 정치적 편향 없이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으나 단체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이 단체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보다는 오히려 국전파와 비국전파로 나뉘는 화단 속에서 재야작가로서 어려운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수복 이후 수도여고를 거쳐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 동구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재직하였고, 1963년부터 1967년까지 홍익공업전문학교 교수(당시 홍익공업전문학교 교수인 박서보가 홍익대학교 교수로 감에 따라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p. 48.)로 임용되었다. 이후 짧은 교수 생활을 마치고 평생 전업 작가로 활동하였다.

조병현의 주요 예술 활동과 조형 세계 ● 1957년은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이 되는 해이다. ‘모던아트협회, 신조형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협회’ 등이 反 국전의 기치 아래 동시다발적으로 창립되었다. 1950~70년대 조병현의 전시 활동 무대는 국전 대신 주로 동인전과 개인전을 통해 이어졌다. ● 특히 1957년은 조병현에게 기하학적 추상 작가로서 행보를 이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조선미술동맹에서 만난 ‘변영원(변형원(1921~1988))’과 함께 ‘신조형파’(신조형파는 1956년에 결성되어 1957년에 창립전을 열었으나 1959년 3회전으로 중단. 화가로는 ‘김충선, 변영원, 변희천, 이상욱, 조병현, 황규백’, 디자이너 ‘김관현, 손계풍’, 건축가 ‘이상순’이 창립 멤버이다. 창립의 이념 선언에는 1. 우리들은 민족미술의 창조적 전통성을 계승한다. 2. 우리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창조탐구에 전념한다. 3. 우리들은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한다. 같은 책, p. 40.)를 창립하였다. 이 단체는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건축, 디자인 전공자들도 참여하여 한국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표방했다.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액자에만 머물지 않고 생활 속 현대미술로 확장되는 실천을 지향했으나, 이념이 시대에 너무 앞서 3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후 조병현은 1962년 결성된 ‘신상전’(≪신상전≫은 1962년에 결성되었고, 창립회원은 강록사, 김종휘, 김창억, 문우식, 박석호, 유영국, 이봉상, 이대원, 이정규, 임완규, 정건모, 정문규, 조병현, 한봉덕, 황규백 그리고 손동진, 유영필, 이준, 이수재, 장욱진이 있었다. 같은 책, p. 29.)의 창립회원이자 총무로 활동했다. ‘신상전’은 신인 등용문인 공모전을 개최하며 화단에 큰 영향력을 끼쳤지만, 7년 만에 막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1978년에 구상과 비구상을 아우르며 개성적인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참여한 ‘상형전’에 원로작가로서 작고할 때까지 꾸준히 참여하였다.

조병현의 주요 작업의 세계를 살펴보면, 초기 선전에 출품한 작품은 구상에서 출발했으나, 1950년 전후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비구상의 형식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기하학적 추상의 구조적 작업의 절정을 이루고 후반기에는 생명력이 머금은 자연 풍경을 그린 구상작품으로 회귀하였다. ● 작품에서 나타나는 초기 작업의 고민은 구체적으로 화면을 분해하거나 재구성을 하면서 자유스럽게 형태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조병현은 김정희의 추사체(같은 책 p. 32.)에서 영감을 받아, 1960년대에는 먹의 운필을 살리며 내적 감정을 표현한 꿈틀거리는 비구상의 작품을 시도하며 무(無)에서 형(形)을 탐색하고자 했다. 또한 한국적 무늬 같은 엽전 모양을 구성한 작품 등 예부터 내려온 민족적 모티브를 탐구하기도 했다. 옛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자연스럽게 ‘형식과 내용은 새롭게 하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라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 1970년대 말까지 조병현은 작품에서 수학의 근본 원리를 풀 듯이 나름 고심하며 바우하우스의 구성 원리를 한국적 미학으로 재해석하는 기하학적 추상 작업을 지속하였다. 흰 바탕에 기본형의 사각, 삼각, 원 등 기하학적 도상을 다시 활용하고, ‘자연의 천지 같은 청색’( 같은 책 p. 36.)이나 주황색을 바탕색으로 원색과 보색 대비로 화면을 재구성하며 자신만의 형이상학적 감수성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조병현의 작품 세계관이 전환되는 계기가 생겼다. 비구상의 기하학적 추상 작업에서 색채와 형태를 단순화하다 보니,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에 대한 회의와 작업이 잔재주를 부리는 것 같은 고민을 느끼게 되었다.(KBS TV 미술관, ‘양화가 조병현 작가’ 1985. 8. 25. 인터뷰 중) 이때 그는 자기의 작품에서 ‘인간미’의 부재를 인식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50대가 넘은 나이에 마음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면서 보이는 대로 자연을 스케치했다. ● 그 과정에서 조병현은 범 자연관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풍경이 오늘 그리고 나면, 다음에 볼 땐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라며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고 한다. 조병현은 이렇게 자연을 관찰하며 풍부한 자연의 색과 무한한 형체의 변화를 보면서 ‘자연을 제대로 보고 자연이 크게 움직이는 걸 그려야겠다. 이것이 내 스승이고, 뭔가 찾아야겠다’라며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연 앞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비구상에서 구상으로 작업을 전향한 후, 기법이 무르익지 않아 자신만의 제대로 된 그림을 선보이는 데까지 1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거의 기하학적 작품이 작가로서 창의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작업이라면,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은 바로 자연의 속살을 발견한 풍경화였다. 그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단순한 재현에 두지 않았다. 대신 조형 회화의 색면 구성을 활용해 자연을 대담하게 재구성하며, 이를 통해 보는 사람을 자연의 상징적인 세계로 이끌고 있다. ● 故 유준상 평론가는 “자연은 묻는 자에게만 대답한다.”(같은 방송, 유준상 평론가)라며, 조병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자연에 물음을 던지고 얻은 풍경을 재현한 그림으로 평했다. 작가는 이렇게 싱그러운 녹음(綠陰)에서 오묘한 색을 발견하고 세밀한 재현보다는 대담한 평면 구성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를 풍경화에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조병현을 이지적인 기하학적 추상의 형(形)을 벗어나, 추상과 구상의 양식을 조화롭게 넘나든 독창적 조형감각을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나가면서 ● 조병현은 70년이라는 긴 화업의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남 앞에 드러남 없이 고집스럽게 자기의 역사를 개척해온 작가이다. 기하학적 추상 작업의 선구자였지만, 추상보다는 오히려 ’산 풍경, 파이프 담배, 청바지, 아령, 건강 그리고 조용한 인품‘ 의 소유자로 그는 기억되고 있다. 짧은 교직 생활을 제외하고 평생을 전업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태평양미술학교 시절에 경험했던 자유스러운 화풍에 길들어진 재야적 반골 기질과 세상의 명리를 좇지 않은 소신일 것이다. 그러나 외유내강의 인자한 그의 성품은 그림 속에 스며들어 있고, 화려한 예술적 업적보다 욕망을 덜어내고자 하는 삶과 예술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고 있다. ● 구술 채록을 통해 본 조병현은 화단에서의 원만한 인간관계와 남한테 신세 지기를 싫어하는 대쪽 같은 성품을 ’충청인의 기질‘로 수줍게 말하고 있다. ‘기하학적 추상에서 풍경으로 가는 여정’ 전시를 통해 조병현이 두 상반된 미학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해 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지역 화단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작가에 대한 재평가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손명희

Exhibitions
Review

조병현의 아카이브와 추상 작품세계
미술이론가 박미화


1. 머리말
한 사람의 역사는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크고 작든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마지막에 이른다. 미술에서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작품으로 꽃 피우며 생성소멸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어떤 작가이든 만개하는 전성기는 있다.
조병현은 1921년생으로 출생연도를 기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준에 따르면 1930년 이전 출생 작가를 근대기로 구분한다.
으로 볼 때 근대기 작가에 속한다. 그러나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49년부터 꾸준히 개인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근대 시기의 작품은 거의 전무하여 근대기의 전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작가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기꺼이 재야를 선택한 조병현은 나름의 창의성과 조형성을 갖고 진지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어 미술사적 의의를 찾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꽤 충실히 정기적으로 가진 개인전과 아카이브 개인전 브로슈어, 신문기사, 구술 채록 등
를 중심으로 조병현의 전성기 필자는 조병현 작가의 전성기를 1957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에 이르는 기간을 추상기이자 그의 전성기로 보았다.
라고 할 수 있는 추상 작업 시기의 작품에 대해 조사·연구하고자 한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에 걸친 그의 추상 작업은 작가 개인의 필연성뿐만 아니라 작가가 몸담고 있는 주변의 사회적·문화적 배경에 영향받은 결과물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196,7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을 공고히 하고 그의 작품세계가 갖는 미술사적 의의를 찾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생애와 초기 작품 활동
조병현(1921~2011)은 충북 청원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괴산에서 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10살 즈음해서 서울로 옮겨와 거주하게 된다. 그의 학력은 서울 효창국민학교를 거쳐 선린상업중학교를 다녔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1942년경 일본에 건너가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갔다.
일을 하면서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작가에 의하면, 당시 태평양미술학교는 주·야간으로 누구나 와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으며 졸업이라는 개념도 없었다고 언급하였다. 때문에 그의 이력에는 ‘졸업’이 아닌 ‘수학’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훗날 졸업장이 필요한 시기에는 ‘교수자격증’을 취득하여 홍익공업전문대에 교수로 취직할 수 있게 된다. 조병현 구술 채록서, 삼성문화재단, 2008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효창국민학교 시기 일본인 미술 선생님이 친구에게 ‘조병현은 미술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다’라고 한 것 때문이다. 이 말을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조병현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미술’로 정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위의 책, p.17.

1943년과 194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 제23회(1944) 조선미술전람회에 <농촌풍경>으로 입선하였다. 조병현 구술 채록 기술서, 삼성문화재단, 2008, p.51.
하였으나, 작품이 남아 있지 않고 도록도 발행되지 않아 어떤 작품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병현의 작품활동 시기를 조선미술전람회 출품부터 2011년 작고할 때까지 60년 여 기간 중 1957년 신조형파에 가담하여 추상작업을 하기 전까지 약 10년 기간은 초기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1943년에 귀국한 조병현은 1946년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출품하기도 하면서 조병현은 오지호가 중심이 된 조선미술가동맹(‘46. 2.)과 김주경의 조형예술동맹(’46.5.)이 합쳐서 결성된 조선미술동맹(46.11. 10.)에 가입하여 <무제>라는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출품한다. 그러나 조병현은 조선미술동맹의 회원들도 다른 여타의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음에 회의를 느끼고 곧 탈퇴하게 된다. 조병현 구술 채록서, 삼성문화재단, 2008. p.31.
1949년부터는 꾸준히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추상작업 이전의 초기 개인전은 총 4회이며, 1회를 제외하고 2회(1950년, 도1), 3회(1954년, 도2), 4회(1955년, 도3) 개인전의 브로슈어 자료가 모두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도록이 아닌 출품 작품 목록만 인쇄된 브로슈어 자료이기 때문에 작품의 이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효자골>, <모자>, <누이동생>, <만수리> 등 출품작품 목록의 작품명에서 구상 계열의 작품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보도된 신문 기사에서 1955년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 이미지 조선일보, 1955. 11. 29. 문화단신
(도4) 1점을 다행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대상을 단순화하여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1954년 개인전 브로슈어에는 국영문을 별도로 구분하여 표기한 것으로 보아 초기부터 국제적 흐름을 유념하고 있으며, 1954년과 1955년의 개인전 표지에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의 후원으로 기록되어 있어 작가의 교편생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병현은 초기에는 풍경 사생화 위주의 구상작업을 하였다. 소재는 그가 살았던 흑석동에서부터 6.25 전쟁 기간 동안 머물렀던 무량사 풍경 등 주변 생활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거주지를 이사할 때 작품을 잘 버리곤 하여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도1) 1950년 조병현의 유화 개인전 브로슈어, 유족제공 좌) 표지, 우) 내지: 목록



도2) 1954년 조병현의 유화 개인전 브로슈어,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센터 소장
좌) 표지, 중) 내지, 우) 뒷면





도3) 1955년 조병현의 유화 개인전 브로슈어, 유족제공
좌) 표지, 중) 목록
도4) 1955년 개인전 출품작 이미지, 조선일보, 1955. 11. 29.

3. 추상의 전개
이상에서 조병현은 1955년 제4회 개인전까지 거의 풍경화와 인물화 중심의 구상작업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55년 이후 조병현은 더 이상 구상작업을 하지 않고 추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작가가 추상을 도입하게 된 자연스러운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해 본다. 첫째 어릴 적 선린상업학교를 다니고,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1942년 개교 후, 현재는 특성화고등학교로 성북구의 금융·콘텐츠·디자인·공연 분야의 남녀공학 학교이다. 2023년 서울동구고등학교로 변경하였다.
에 근무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수용적인 관점이 작가의 내면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바우하우스를 기본 모델로 하고 있는 신조형파에 가담하면서 ‘예술의 생활화’라는 이념 아래 본격적으로 새로운 조형적 시도와 실험을 화면에 시도할 수밖에 없는 필요성이 생겼을 것이다. 셋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가적으로 산업사회로의 성장은 디자인 분야에 대한 사회적 전망과 분위기, 그리고 필요성을 나름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병현은 타고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추상작업을 약 20년간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조병현은 또다시 풍경화로 귀환하고 만다. 이는 그가 형식적인 조형 실험 정신은 투철하였지만 이러한 그의 추상작업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자신만의 미술이론과 미학의 부재로 초기의 사생화에 대한 심적 안도감과 편안함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1) 신조형파와 큐비즘적 경향
조병현은 1956 신조형파가 태동되었던 시기는 1956년부터라 볼 수 있다. 전시는 제1회(1957.6.27.~7.4.) 동화백화점 화랑, 2회(1958.6.8.~14.), 중앙공보관, 3회(1959.8.1.~7.) 중앙공보관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년부터 1959년까지 신조형파에 참가하면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하게 된다. 가장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큐비즘적 화면 구성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던 피카소의 열풍은 한국에까지 미쳐 있었고, 조병현도 그에 영향받아 큐비즘을 자신의 풍경화에 적용하게 된다.
신조형파는 바우하우스를 유입하여 민족미술의 창조적 전통성 계승, 현대미술의 새로운 창조 탐구에 전념,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한다는 이념을 표방하였다. 조병현은 신조형파의 발기인 7인 조병현 외 김관현(디자인), 변영원, 변희천, 손계풍(디자인), 이상순(건축가), 황규백
중 한 명이었고, 주도적으로 움직인 작가는 변영원(1921-1988)이었다. 1957년 6월 27일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첫 발표를 하였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재건과 발전에 미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다짐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순수회화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2명, 건축가 1명이 합류하여 응용미술까지 포함함으로써 여타 다른 미술 그룹과 많은 변별성을 갖는다.
신조형파전은 추상미술 중에서도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현대미술을 추구함에 있어 20세기 후반의 현대사회는 과학, 기계, 물질문명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보았고, 변영원은 회화도 선과 색이라는 기본 요소에 의해 재구성하는 추상으로써 과학적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강은아, 신조형파의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미술》, 국립현대미술관, 2023, p.242.
변영원의 이러한 주장들은 신조형파 전체의 이념을 표방하는데 주요 이념이 되었고, 조병현 또한 변영원과 동갑내기로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영향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술 채록에 의하면 조병현은 전반적으로 변영원의 인품에 대해 긍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념 아래 출발한 신조형파는 1959년까지 3회의 전시를 끝으로 종료되었지만, 미술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최초로 디자인과 건축 분야가 가담하면서 한국 미술사에서 응용미술 분야의 중요성을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병현은 사생화를 주로 그렸었는데 신조형파에 가담하면서 당시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었던 피카소의 큐비즘에 경도되어 화면을 삼각형, 사각형 등의 큐비즘적 화면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이는 어릴 적 다닌 선린상업학교와 직장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등에서 받아들여진 생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그의 작업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신조형파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생활화’는 산업국가로 나아가는 국가 정책에 매우 부합하는 이슈였을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한민족의 전통을 잇고, 엄연한 산업국가로 국제적 경쟁력을 갖기 위해 현대미술은 다양한 실험 영역을 적극 수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디자인은 ‘회화적 디자인’으로, 순수회화는 응용미술의 적극 수용으로 각각 확장되어 갔다.
이 시기 조병현의 작품은 다행히도 신조형파 참가자인 건축가 이상순 이상순은 카메라를 구입하여 모든 참여 작가의 출품작품을 촬영해 두었고, 모든 관련 사진아카이브를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 기증하여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남긴 흑백 사진자료(도5,6)로 작품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작품은 화면 전면을 기하학적인 면 분할로 처리하여 색을 채우고 있는 작품이다. 앞서 2회 개인전에 출품한 <여인 인물>보다 완성도가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조병현은 구상에서 과감하게 기하학적 추상으로 전환하여 큐비즘적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도시풍경’을 매우 성실하고 꼼꼼하게 면으로 분할하여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병현은 당시 여느 작가들처럼 국제적 미술 흐름을 일본을 통해 들어온 미술 수첩과 같은 잡지를 접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피카소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6월에 창립전을 개최한 신조형파 그룹 회원들은 그해 연말에 열린 조선일보사에서 개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 모두 초대되어 출품하게 된다. 《현대작가초대전》은 전국 규모의 새로운 작품을 시도한 작가들을 초대하여 개최한 전시로 당시 영향력 있는 전시였던 만큼 신조형파 회원을 초대하였다는 사실은 이들의 활동과 기하학적 추상이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도5) 조병현의 제1회 신조형파전 출품작, 195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이상순 기증
도6) 조병현의 제1회 신조형파전 출품작, 195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이상순 기증
. 실제로 조병현도 초대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보였다.




2) 추사와 앵포르멜 경향(1962~1966)
조병현은 1957년 ‘신조형파’를 계기로 기하학적인 추상 작업에 몰입하게 되지만 풍경화의 큐비즘적 해석과 재구성은 앵포르멜 경향으로 또 한번의 탈바꿈을 하게 된다. 아마도 1회 신조형파 이후, 작가는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를 전후로 조형적인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추사체는 새로운 추상 실험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신조형파 활동 이후 조병현은 추상화가로 자리 잡으면서 그만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타고난 성실성으로 탐구와 실험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조선일보사에 출품된 작품 경향은 알 수 없지만 1962년 제5회 개인전 제5회 조병현 유화 개인전, 1962. 4. 21.~ 30, 수도사대화랑
(도 7)에 선보인 작품은 검고 굵은 선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거친 추상화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추사(1786~1856) 그림 보구서 내가 깨달았어요. 추사의 초서를 보았는데 저거 그림 그려도 되겄다 말이야... 제일 힘써 얻은 것이 추사의 그것이 그림도 된다. 자유스럽게 맘대로 그릴 수 있고...” 조병현 구술 채록서, 삼성문화재단, 2008, pp. 32~33.

5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앵포르멜 경향의 출품작품 수는 28점이다. 추사체 특유의 꺾인 듯한 붓 터치와 고졸한 느낌의 굵은 선을 닮은 화면은 마치 태초의 생명이 탄생하기 직전의 혼란을 연상케 한기도 한다. 화면의 질감 또한 짙은 물감을 두텁게 발라 거칠게 표현하고 있어 앵포르멜의 전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굵고 검은 선으로 표현된 어두운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이 시기의 작품은 현존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 그러나 현존작품 2점(도 8,9)과 도록 자료(도10)에서 추사체의 영향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도7) 5회 조병현 개인전 브로슈어 표지 우) 내지 작품이미지



도8) 조병현, <작품 8-60>, 1960, 캔버스에 유채, 91×11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근대미술 60년전 출품, 1972
도9) 조병현, <작품 5-59>, 1959, 캔버스에 유채, 73×91cm, 예술의 전당 소장
도10) 조병현, 작품, 1958, 53×73,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출처: 한국현대미술-1950년대 도록, 1979






도11) 조병현 6회 개인전 브로슈어 표지, 가운데: 내지 작품 이미지, 오른쪽 내지 작품 이미지 상: <작품 9-65>
조병현의 추사체에 영향받은 앵포르멜 경향은 1966년 6회 개인전 제6회 조병현개인전, 1966.3.29.~ 4.3. 중앙공보관화랑
(도11)에서는 유사한 형식이지만 모티브는 옛 엽전으로 옮아간다. 출품 작품수는 18점이며, 5회에서보다 매우 안정적인 구도와 양식으로 깊이를 더하고 있다. 앵포르멜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엽전’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끌어와 자신의 조형적 모티프로 활용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한국 고유의 엽전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1964년 뉴욕의 ‘세계박람회’, 런던과 베를린의 ‘세계수공예박람회’ 등에 한국의 전통적인 엽전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기사가 많이 보도되었다.
화면은 여전히 검은 선적인 표현과 거친 마티에르 효과를 내고 있으면서도 5회 개인전 출품작보다 구도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면서 흑백의 농담이나 색상에 변화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운데 둥근 모양의 형상으로 시작하여 층층이 겹쳐져 있는 엽전 꾸러미는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다. <엽전의 환상>이라는 작품명도 매우 흥미롭다. 작가는 왜 환상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과거 전통적인 엽전으로 달러 즉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대한 환상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여하튼 조병현은 주변 환경과 지속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독특한 조형성으로 자신의 개성을 찾아 나갔다.




3) 신상전과 기하학 추상
1960년대 한국미술 현장은 역동적이었다. 추상미술의 강한 흐름, 실험미술과 각종 이벤트 등으로 사회 참여 목소리가 커졌고, 작가들은 자신의 이념과 방향을 그룹전을 통해 강조하면서 많은 그룹전이 생성되기도 하였다. 조병현은 신조형파에 이어 1962년 ‘신상전 창립회원으로 유영국(1916~2002), 임완규(1918~2005), 박석호(1919~1994), 김창억(1920~1997), 이대원(1921~2005), 조병현(1921~2011), 한봉덕(1924~1997), 황규백(1932~), 문우식(1932~2010) 등 24인으로 회원전과 공모전을 모두 진행하였으며 1968년 7회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에 참여하였고, 신상전은 순수회화를 추구한 그룹으로 공모전을 병행하였다. 이 시기 조병현이 신상전을 중심으로 전개한 작품 경향은 현존하는 작품과 1962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개최한 개인전 브로슈어를 통해 작품 경향을 분석해 볼 수 있다. 그는 6회 개인전을 끝으로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은 더 이상 제작하지 않은 듯 보인다. 1년 뒤인 1967년에 개최한 7회 제7회 조병현 유화개인전, 1967. 11. 23. ~ 28. 중앙공보관화랑
(도12) 개인전부터는 화면에 점, 선, 면을 사용한 기하학적인 작품 경향을 보이면서 또다시 기하학적인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며. 이후, 8, 9회 개인전에서는 기하학 추상이 비교적 안정적인 변화를 보이면서 발전적인 양상으로 나아간다. 필자는 추상의 조형적 실험이 이루어진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를 조형성과 완성도, 그리고 미술사적인 중요도 측면에서 조병현 작가의 전성기로 설정하고자 한다. 도구를 활용하였을 법한 원과 수직·수평선, 사각형, 원형, 삼각형 등 기하학적 도형의 구도와 푸른색, 붉은색, 검은색 등 원색을 활용한 작품(도 14)에서부터 미묘한 색의 변화를 주는 작품(도 15) 등에 이르기까지 그를 대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도12) 위: 7회 조병현 유화 개인전 브로슈어 표지, 가운데: <무제 2>, 오른쪽: <작품 7-67> 아래: <작품 5-67>

도13) 유족 소장, 7회 브로슈어 내지의 작품과 거의 동일





도14) 조병현, <작품 2-69>, 1969, 캔버스에 유채, 128×12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도15) 조병현, <작품 10-69>, 1969,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유족소장

7회 개인전(도 12)에 출품된 작품 경향을 볼수 있는 예는 꽤 많이 남아 있다. 조병현은 작품명을 쓸 때 추상 작품에 적정한 ‘작품’이라 명하고, 일련번호와 제작연도를 붙였으며, 간혹 ‘무제’라는 제목에는 일련번호만 표기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앞의 질서를 지키고 있다. 전체적인 작품 경향은 도구를 사용하여 기하학 도형과 직선을 화면에 구성하였고, 선과 면의 적정한 조화를 통해 화면의 긴장감을 준다. 동시에 각각의 요소들이 분리되지 않고 집중될 수 있도록 대형의 원이나 다각형을 그려 넣고 있다. 이러한 조형 원리는 바우하우스와 신조형파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각각의 도상이 말하는 상징성을 언급한 바는 없으나, 작가는 스스로 ‘공상’에 의한 구성임을 강조하였다. 조병현 구술 채록서, 앞의 책, p. 36.
그에게 푸른색은 ‘자연의 천지 같은 청색’으로서 많은 작품에 주조색으로 사용되었다. 이렇듯 이 시기 조병현은 안정성과 변화있는 색감, 기하학적 도형을 활용한 화면 구성 등 추상 작가로서의 길을 충실히 열어가고 있었다.

조병현은 1970년 8회 개인전 8회 조병현 개인전, 1970.10.1.~ 6. 신문회관 화랑
(도16)을 7회를 개최한 3년 후에 가진다. 총 20점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대형 작품이 많으며 그중에서도 특이할 점은 앞의 다른 개인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브로슈어의 겉면이(도16) 컬러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품의 내용이나 구성보다 색채가 가장 중요하였음을 시사한다. 당시 화단은 한국의 정통성과 주체성 표현에 많은 작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전시에서 선보였다. 조병현 또한 8회의 개인전에서는 그동안의 푸른 색조에서 붉은색으로 주조색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 다음에 이거, 이것도 인제 뭐 그냥 색깔 가지고 한번 해 본 거고, 이게 이거 한국에 있는 무늬 아니야.. ” 조병현 구술 채록서, 앞의 책, p. 124.

현재 이 시기의 붉은 색 주조의 작품은 2점(도16, 17) 밖에 되지 않아 아쉽지만 당시의 미술계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화된 배경과 색채의 구성은 7회 때의 작품과 유사하면서 강렬한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푸른색은 전통 오방색을 떠올리게 한다. 8회 개인전 관련 기사(도 18)의 배경을 보면, 대작들이 많고 기하학적인 면 구성의 작품이 주로 출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16) 8회 개인전 브로슈어 표지
내지의 작품 이미지
도17) 조병현, 작품11-70, 1970, 캔버스에 유채, 112×112cm
도18) 8회 개인전 관련 기사, 경향신문, 1970.10.3.자


작가는 1972년에 9회 개인전 9회 조병현 유화 개인전, 1972.10.3.~ 8., 신세계 화랑
(도 19)을 개최하게 된다. 9회에서는 다시 푸른 색조를 주조로 극도의 단순화된 면 처리가 두드러진다. 구성과 색채 면에서 매우 단순한 처리를 하여 강렬한 주목성이 있는, 즉 군더더기 없는 작품들이 선보였다. 예를 들면 <작품 10-71>(도20)과 동일한 작품으로 보이는 9회 브로슈어 내지의 흑백 작품이 대표적이다. 화면 가득 채운 원형은 네 면에서 조금씩 잘려 더욱 커 보이며 상대적으로 중앙의 붉은색 마름모는 바탕의 짙은 남색톤과 색채대비를 이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외에도 브로슈어 뒤 겉표지 작품 또한 <작품 3-71>(도 21) 작품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중앙을 비켜서 상하로 삼각형을 중복으로 배치하여 운동감을 주었으며, 배경은 푸른색의 다각형이다. 이 다각형 또한 캔버스 양 세로 면과 밑면에서 잘린 역 삼각형 모양임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결국 그의 극단적 추상 세계는 회화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절대주의적 관점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도19) 9회 개인전 브로슈어 표지
브로슈어 내지: 작품이미지와 목록
도20) 조병현, <작품10-71>, 1971,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출처:◆한국현대미술전집 13권
브로슈어 뒷면: 작품이미지
도21) 조병현, <작품 3-71>, 1971, 캔버스에 유채, 145×9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상 조병현의 추상화 시기를 신조형파와 신상전, 그리고 총 5회의 개인전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다루었다. 9회 개인전 이후 그는 약 5년간 그룹 전시를 통해 추상 작업을 더 제작하게 된다.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한국현역작가 100인전》에 출품한 작품은 <작품 4-73>(도22)과 <작품 5-73>(도 23)이다. 이 두 작품은 화면 전체에 같은 톤으로 처리된 단색조에 중복된 사각형과 원형, 화면 전면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그리고 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점, 선, 면에 의한 매우 단순화한 기하학적 구성만을 시도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처럼 조병현의 추상화 발전단계에서 최소한의 도형과 선만을 활용한 이 시기의 작품은 9회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품과 함께 궁극적으로 조형의 순수성을 향한 탐구라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도22) 조병현, 작품 4-73, 1973, 캔버스에 유채, 130×160cm, 한국현대미술 현역작가 100인전 도록, 1973
도23) 조병현, 작품 5-73, 1973, 캔버스에 유채, 131×130cm, 출처: 한국현대미술 현역작가 100인전 도록, 1973



1973년 이후 조병현의 작품활동 이력은 약 3년간 없다가 현재 자료상으로는 이 시기의 이력을 찾을 수 없을 뿐임을 밝혀둔다.
1977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현대미술대전: 서양화》 전에 출품하게 된다. 그의 추상화 단계에서 거의 막바지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이 해에 전국을 일주하며 제작한 풍경화 소품전을 태인화랑 조병현 소품전, 태인화랑, 1977.4.1.~ 7.
에서 가진 것으로 보아 출품하는 전시 경향에 따라 추상과 구상작업을 병행한 듯하다. 이 시기의 출품작(도 24, 25, 26)은 기하학적 구성은 사라지고 앵포르멜적 경향과 기하학적 양식이 혼합된 듯한 종합적인 양상을 띤다. 좌측 상단의 푸른색의 선적인 면처리와 회색조의 엉킨 듯한 굵고 둥근 선적인 표현 위에 공통적으로 네모 박스 안에 기하학적인 형상을 넣고 있다. 작가는 “...이게 뭐냐면 이런 공간 안에서 나 혼자 고립되어서 여기서 고독하게 있다... 혼자서 추상화를 하니 점점 고립되어진다... ”라고 언급하였다. 앞의 책, p. 35.
즉, 화면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기하학적인 표현을 하고 사각형은 주변과 분리되어 고독하게 추상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필자는 작가의 이러한 심적 상태 또한 더 이상 추상 작업을 하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 풍경을 사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도 24◆ ) 작품7-77, 1977,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도 25◆ ) 조병현 5-76, 1976, 캔버스에 유채, 111×16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한국현대서양화대전 도록, 1977
도26 ◆ ) 작품6-76, 1976, 캔버스에 유채, 73×91cm, 한국현대서양화대전 도록, 1977


4. 맺음말
조병현은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을 마무리 짓는 작가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근대 시기를 지나, 1957년 신조형파를 계기로 전환한 그의 추상미술은 1977년까지 지속된다. 20여 년간 그의 작품세계는 시기별로 주요 흐름에 영향 속에서도 지속적인 조형 실험을 통해 독창성을 갖는다. 초기 피카소에 영향받은 큐비즘적 화면 구성에서 추사체에 영향받은 앵포르멜 경향, 다시 순수회화의 본질을 추구하는 점·선·면에 의한 기하학적 추상, 그리고 1972년 마지막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절대주의적 경향에 이른다. 각각의 과정들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매몰되지 않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적 요소와 질서를 찾아내어 조화시켜 나갔다. 마침내 그의 마지막 종착지점은 모더니즘의 궁극을 보여주는 절대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한국미술에서 모더니즘 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